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크 맥과이어 (문단 편집)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맥과이어는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리그]]에서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파워 히터로 엄청난 성장을 보였고, 1986년 메이저리그에 잠시 모습을 보였으나 본 포지션이 아닌 3루수로 데뷔한 부담감 때문인지 18경기 출장, 0.189, 3홈런으로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하였다. 루키 시절 본인 아버지의 환자이기도 했던[* 맥과이어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다.] [[토미 존]]에게 멀티히트를 때려낸 에피소드도 있다. 본격적인 풀타임 시즌인 1987년 5월초까지도 3루 수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여전히 타격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3루 수비에 애를 먹는 그의 타격을 살리기 위한 결정으로 1루수로 기용하자마자 5월 한달간 15홈런의 엄청난 페이스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에 30홈런을 달성하는 등 루키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8월에 이미 [[프랭크 로빈슨]]이 기록한 신인 최다홈런 38개를 훌쩍 넘어버린 맥과이어는 전인미답의 신인 40홈런은 물론, 신인 50홈런까지도 기대할만한 상황이었다. 그가 49홈런을 기록한 후, 한동안 명맥이 끊어진 50홈런에 대한 기대가 엄청났던 상황이었으나, 마지막 경기를 남기고 구단의 양해를 구한 다음 경기 출장을 포기한 채 아내의 곁에서 첫 아이의 출산을 함께 지켜보는 것을 택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988년 이혼했지만 맥과이어는 재혼할 때까지 아들 매튜를 혼자서 키웠다.] 결국 루키시즌부터 맥과이어는 '''MLB 역사상 신인 최다홈런인 49홈런[* 해당 기록은 2017년 [[애런 저지]]가 52개로 경신하며 깨졌고, 2023년 현재 최고 기록은 [[피트 알론소]]가 2019시즌 친 53개.], 홈런왕, 만장일치 신인왕'''에 오르는 등 화제를 몰고 다니며 슈퍼스타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맥과이어는 매년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4년 연속 30홈런과 홈런 레이스 순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3,40개를 날려대는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1992년에도 42개의 홈런을 날려 단 1개 차이로 홈런 2위에 오르는 등,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호세 칸세코]]와 함께 '배시 브라더스(Bash Bros.)' 듀오로 당대 최강 오클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1993~1994년 2시즌은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출장하지 못해 2년간 18홈런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1995년 절치부심하여 39홈런으로 재기의 신호를 알린 맥과이어는 1996년 부상으로 132경기만 뛰고도 커리어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무려 52홈런으로 개인 최다 기록과 함께 9년만에 다시 홈런왕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전반기에 맥과이어는 무시무시한 홈런페이스로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기록마저 넘을 페이스였다. 그러나 팀의 명실상부한 프랜차이즈였던 맥과이어는 투자에 인색하여 90년대 초반의 강팀과 거리가 멀어진 오클랜드 프런트에 전력 보강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는데,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트레이드를 요청하겠다는 등 팀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투자 규모를 더 줄일 생각이던 오클랜드는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맥과이어의 가치가 최고일 때 트레이드 방침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오클랜드는 본래 탐내고 있던 유망주 [[브라이언 자일스]]를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딜을 제시했으나, 당시 단장이던 [[짐 하트]]가 자일스는 절대 트레이드 불가로 못을 박으면서 결렬 되었고, 슬러거를 찾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1:3 트레이드 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세인트루이스에게 최고의 선물로 평가되었는데, 빅맥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세기의 홈런 레이스를 벌이는 등 유/무형의 엄청난 홍보 효과와 이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클랜드로 간 투수 3명은 맥과이어의 이름값과 가치를 생각하면 크게 손해 본 트레이드였으며 역시 별 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과정에서 오클랜드보다 클리블랜드가 최악의 삽질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브라이언 자일스는 살인타선으로 유명했던 클리블랜드에서 막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선구안과 장타력, 주루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평을 들었긴 했다. 1997년 기준으로 그 전해 악동 [[알버트 벨]]이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으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맷 윌리엄스]], 애틀란타에 [[케니 로프턴]]을 주고 [[데이비드 저스티스]], [[마퀴스 그리솜]]을, 토론토에서 [[토니 페르난데스]]를 데려왔고, 기존의 [[매니 라미레즈]]-[[짐 토미]]-[[샌디 알로마 주니어]]-[[오마 비즈켈]]이 상하위에 버티는 클리블랜드 타선은 역대 최강 소리를 들을만 했는데, 여기에 맥과이어까지 가세했다면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타선이자 벨이 빠진 자리를 우타 빅뱃으로 다시 채워넣을 수 있는 황금 기회였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건 하트는 이렇게 애지중지 여기던 자일스를 리치 섹슨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겨우 피츠버그의 좌완 셋업맨 리카르도 링콘 딱 1명과 바꿔먹는 어이없는 무브를 보여준다.][* 자일스는 피츠버그로 이적 후 무시무시한 출루율과 4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슬러거로 자리잡으면서 빅맥과도 안 바꾼 하트의 안목을 입증케는 했지만, 링컨은 별볼일 없는 모습으로 일관하다 미네소타에 트레이드 되고 나서야 잠깐 불펜 셋업맨으로 반짝했을 뿐 이었다.] 게다가 빅맥이 이적 후에 보여준 세기의 홈런레이스로 인한 유무형의 이득은 물론, 전국방송에 매일 보도되는 홍보효과까지 감안한다면 당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몰이중인 클리블랜드의 마케팅 효과는 더욱 증폭되었을 터였다. 어쨌건 시즌 중 아메리칸 리그에서 내셔널리그로 이적했기 때문에 이 시즌 맥과이어가 기록한 58개의 홈런은 각각 AL 34홈런, NL 24홈런으로 나뉘어 표기가 되었고 리그 홈런왕에 공식적으로 오를 수 없었지만[* 그 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56홈런을 날린 [[켄 그리피 주니어]]였다. 내셔널리그에서는 49홈런을 친 [[래리 워커]]가 홈런왕을 차지했다.], 1997 시즌의 실질적 홈런왕은 합계 58홈런을 날린 맥과이어로 인정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